한 주말 저녁, 지인들과 함께 한 편의 수사물을 시청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사건의 전말을 따라가는 긴장감이 상당히 훌륭했다. 하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밀려왔다. 극중에서 결정적 용의자로 몰렸던 인물은 실제로는 무죄로 판명된 사람이었는데, 영화는 그를 마지막 장면까지 범죄자로 강하게 의심하게끔 유도했다. 그러고는 자막 한 줄로 ‘실제 재판에서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고 얼버무렸다. 과연 이 짧은 자막이 시청자에게 남은 인상을 모두 지워줄까. 아니, 오히려 영화라는 강력한 매체가 만들어낸 이미지가 진실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닐까. 이런 궁금증에서 출발해, 실화 각색 영화에서 무죄 추정의 원칙이 어떻게 흐려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많은 사람이 실화 각색 영화를 볼 때 ‘재판에서 무죄를 받았으니 영화에서도 그렇게 그려졌겠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영화적 긴장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혹은 반전을 만들기 위해 제작진은 실제 무죄 판결을 받은 인물을 극중에서 오랫동안 용의자로 몰아간다. 특히 알리바이와 관련된 결정적 증언은 극의 후반부를 위해 의도적으로 숨겨지는 경우가 많다. 사건 현장에 없었다는 사실이 영화의 중반부에 나온다면 긴장감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나리오는 무죄를 입증할 핵심 증언을 뒤로 미루거나, 아예 다른 인물의 대사로 변형해 버린다.
역사적으로 한국 범죄 영화의 흐름을 돌아보면,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실화를 각색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시기 작품들은 주로 사회적 약자의 억울함을 다루며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데 주력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실제 유죄가 확정된 사람이 아닌, 수사 단계에서 용의자로 몰렸다가 풀려난 인물이 영화 속에서는 범죄자로 묘사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영화는 진실을 추구한다는 명분 아래, 또 다른 인물의 명예를 희생시키는 셈이다. 실제로 무죄로 밝혀진 사람의 얼굴과 이름이 영화 포스터와 예고편을 통해 반복 노출되면, 그가 무죄라는 사실보다는 ‘그 사건의 용의자’라는 낙인이 훨씬 강하게 각인된다.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각색 과정의 관행을 짚어야 한다. 시나리오 작가는 실제 사건 기록을 바탕으로 극적 구성을 만든다. 이때 핵심 인물의 심리 상태를 가상으로 추리하며 대사를 창작한다. 실제 법정 기록에는 없는 장면이지만, ‘그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력을 더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상상력이 실제 무죄 추정의 원칙과 충돌할 때 발생한다. 무죄 추정은 모든 사람이 법원의 확정 판결 전까지는 죄가 없다는 원칙이다. 그런데 영화 각색은 이 원칙을 반대로 뒤집는다. 실제 무죄로 판명난 사람을 극중에서 ‘의심스러운 인물’로 배치하고, 가능성 있는 증거만 부각하고, 무죄를 입증하는 증언은 생략하거나 변형하는 방식으로 서사를 구성한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올바른 접근법은 무엇일까. 영화 제작진과 관객 모두가 인식해야 할 첫 번째 사실은, 실화 각색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허구적 재구성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기준은 ‘사실 왜곡’과 ‘극적 재구성’의 경계다. 실제 무죄로 밝혀진 사람이 영화 속에서 마치 범인인 것처럼 행동하고 말하는 장면은 단순한 재구성을 넘어선 왜곡이다. 이 인물의 알리바이가 성립하는 결정적 정황, 즉 그가 사건 현장에 없었다는 사실은 영화의 초반이나 중반에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면 영화가 재미없어진다면, 그것은 각색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의미한다. 관객은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왜 무죄인 사람이 유죄로 몰렸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실수가 있었는지를 추적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해야 한다.
실제로 일부 영화는 이러한 접근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왔다. 추리 영화의 명장면을 분석해 보면, 진정한 긴장감은 범인을 특정하는 순간이 아니라, 무죄한 사람이 점점 죄에 빠져드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용의자로 지목된 인물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할수록 상황이 꼬여 가는 구조는, 실제 무죄 추정의 원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방식의 각색은 특정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반면에 실제 인물의 이름과 얼굴을 사용하면서 무죄인 사람을 범죄자처럼 그리는 것은, 단순히 장르적 관습을 넘어 윤리적 문제로 접근해야 할 사안이다.
관객의 입장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일도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실제 사건의 판결문이나 보도 자료를 찾아보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영화가 전달한 인상과 실제 기록 사이의 간극을 확인하는 과정은 매우 유익하다. 특히 등장인물 중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가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영화에서 묘사된 장면이 실제와 얼마나 다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비교 감상은 영화를 더 풍부하게 이해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또한 영화 토론 모임을 운영하는 사람들이나 문화 평론가들도 이 지점을 적극적으로 짚어야 한다. 단순히 연출력이나 배우의 열연을 칭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화 각색에서 인물의 실명 사용과 무죄 추정 원칙의 충돌 문제를 정기적으로 논의한다면, 이 관행은 점차 개선될 수 있다.
영화 음악이 주는 긴장감이나 감독의 연출 스타일 역시 이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특정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불안한 음악이 깔리고, 어두운 조명으로 그를 비추는 방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인물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는 순수한 영화적 기법이지만, 실제 무죄인 사람을 대상으로 할 때는 위험한 장치가 된다. 감독이 이 인물을 구축하는 방식 자체가 관객의 선입견을 조종하는 것이다. 따라서 각색 작업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인물을 어떤 톤으로 연출할지에 대한 내부 지침이 필요하다. 실제 기록상 무죄가 확정된 인물이라면, 연출도 그에 부합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실화 각색 영화에서 무죄 추정의 원칙은 극적 긴장감이라는 이름 아래 쉽게 유린된다. 알리바이 증언이 편의상 뒤로 미뤄지고, 무죄인 사람이 범죄자로 그려지는 관행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영화가 단지 오락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많은 시청자는 실화 영화를 통해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배우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을 형성한다. 그렇다면 무죄인 사람을 묘사할 때도 그에 걸맞은 책임감이 따라야 한다. 실제 사건을 다루는 창작자들은 재미라는 목표와 함께 피해자의 명예를 보호하는 최소한의 윤리를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관객 역시 화면 속 인물이 실존 인물에 기반했다면,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확인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질 때, 영화는 더 성숙한 문화로 나아갈 수 있다.